
[동지기도]
구죽생신순(舊竹生新筍)하고,
신화장구지(新花長舊枝)다.
『오래된 대나무에서 죽순이 올라오고
새 꽃은 오래된 옛 가지에서 자라난다.』
동지는 새 마음이 나는 날이고 새 마음을 내기 좋은 날입니다. 우리가 동지에 팥죽을 먹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온통 어두운 팥으로 그릇 가득히 담겨 있지만 그 속에 들어앉은 새하얀 새알이 숨어있습니다. ‘새알’이 아닌 ‘새(새로운)’ 알을 하나 먹음으로써 우리는 한 살이 더 먹고 조금 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새 알은 가장 어두운 곳에 처해서 다시 새 마음을 일으키는 때에 조금씩 ‘어른’ 이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노인은 처음부터 노인인 것은 아니고 ‘젊은 사람이 노인이 되는 것’이고, 새꽃은 새 가지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묵어서 단단해진 고목의 가지에서 자라납니다. 울긋불긋한 산의 단풍도 푸른 잎이 붉어지는 것이지 따로 붉은 잎이 새로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젊었다 늙는 것은 한 몸의 변화이고, 오래된 고목에서 새 꽃이 피어나는 것은 한 나무의 변화이니, 젊음과 늙음 · 새꽃과 묵은 나무는 두 가지가 아닌 한 몸입니다.
죄와 복, 재앙과 복덕은 두 가지로 별개의 것인 것 같지만, 한 마음을 잘못 단속하면 복이 곧 재앙으로 변하는 것이고, 한 마음을 잘 단속하면 재앙도 곧 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과 재앙은 정해진 팔자를 따르는 것은 아니고, [지금 이 순간 순간에 내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주팔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주팔자는 지금으로 치면 통계학과 같아서, 그것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진리는 아닌 것이기에 언제라도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팔자가 정해져있다면 애써 열심히 살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사주를 믿지 않고 부처님 가피를 믿고 하루를 감사히 여깁니다.
우리가 두려워 하는 ‘삼재’란, 수재水災 · 화재火災 · 풍재風災 이 세 가지의 재앙을 말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서 보자면,
물의 재앙인 수재水災는 [탐내는 마음인 탐심貪心]이고, 불의 재앙인 화재火災는 [성내는 마음인 진심瞋心]이며, 바람의 재앙인 풍재風災는 [어리석은 마음인 치심癡心]을 말합니다.
물처럼 음침한 탐욕과 불처럼 타오르는 성냄과 바람처럼 중심된 지혜가 없이 이리저리 바람를 타고 방황하는 어리석음인 이 세가지 독이 바로 삼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삼재의 세 가지 재앙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 일어나서 그 업을 따라 인연을 지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하는 것’이 [최고의 부적]이 되고, 그 부적을 지니는 방법은 ‘관세음보살’ 혹은 ‘나무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명호를 늘 입에 붙이고 가슴속에 품거나 ‘이 뭣고?’화두를 통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하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라.”
밤마다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고,
아침마다 아침마다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다.
이렇게 불보살님의 명호를 가슴에 품고 하루를 지내면 오는 삼재라 하더라도 재앙은 복으로 변할 것이고, 온갖 탐욕심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지내면 삼재가 아니고 전생에 아무리 좋은 복을 지어놓았다 하더라도 곧 재앙으로 변해갈 것이니,
세 가지 재앙인 삼재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동지冬至를 기해서 집에서 하루에 한 번씩 천수경을 독송하면서 관세음보살님과 우리가 닮아갈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새롭게 일으킬 것이며, 걷거나 앉거나 누워서 있을 때나 ‘이 뭣고?’혹은 ‘관세음보살’을 염두에 두고 지내신다면, 그 어떤 삼재가 온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화는 복으로 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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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가장 밤이 길고 어두우며 찬 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때에 밝고 따듯한 양의 기운이 비로소 하나 생겨나는 때입니다. 하루로 보자면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가 가장 어두운 때인 ‘자시子時’인데, 그때 비로소 일양 하나가 생겨나는 시간이니 이 때를 하루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렇게 고요한 몸에서 생겨난 일양一陽은 전날의 피로와 긴장들을 녹이고 회복시켜서 다시 하루를 활동할 수 있게 해주며, 일년으로 보자면 바로 이 동지가 한 해의 시작이 되어서 언 얼음을 녹이고 새싹이 새로 돋아나게 합니다.
동지의 일양은 비록 아주 적기는 하지만 세상을 가득 매웠던 겨울 기운을 봄기운으로 변화시키는 아주 커다란 힘을 가집니다. 찬 겨울을 저 멀리 몰아내고서야 따듯한 봄을 이곳으로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의 한 복판에서 겨울을 봄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이 ‘하나의 양, 일양’에 있습니다. 우리도 이 작지만 아주 커다란 이 새로운 [신심信心]이라는 힘을 빌어서 우리가 원하는 바 기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뜻이 이 동지기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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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그런 사람이 아직 세상에 있어요? 말세라 그런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그 적은 하나의 양으로 인해 긴 겨울 가운데 이 넓은 세상이 봄으로 변하듯이, 백명 중 한 두 사람이 자신의 본분과 마음자리를 지킴으로 해서, 양심을 지킴으로 해서 다른 사람도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이 세상을 무던히 지낼 수 있도록 서로를 도웁니다.
어떤 정치인들이건, 어떤 회사이건, 어떤 병원이건, 어떤 교육단체나 종교단체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의 양, ‘하나의 양심있는 사람’이, 신심있는 수행자가 그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으며 넓은 이 세상을 무던하게 해줍니다. 그러다 백명 가운데 한 두 사람이었던 그 사람도 시간이 오래지나면서 꼭 쥐었던 주먹이 스르르 풀어지기마련인데,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 옆 사람을 보면서 자신도 또다시 주목을 말아쥐고 넘어진 땅에서 일어나 먼 길을 용기내어 걸어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건 ‘양심’ 있는, 어진 마음이 있는 그 한 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 한 두 사람이라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 한 두 사람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하나의 초가 수많은 초에 불을 붙여 주고, 자신의 촛불이 또 꺼질 때 쯤 붙여주었던 그 옆의 초에 다시 자신의 심지를 기울여 스스로 불을 댕겨 밝혀가듯이, 그렇게 이 세상은 아침과 저녁으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서 등불을 밝히고 세상을 밝힙니다.
그 촛불을 붙여주는 곳, 와서 초에 불을 댕겨 가는 곳이 바로 이 혜양사가 되기를 저는 바랍니다. 도량이란 본래‘도장道場’이니, 수련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이 온통 밝지 못한 어두운 무명심으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한 생각 바른 신심을 일으켜 다시 부처님전에 백팔배를 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염불하고 화두를 한다면, 그 신심은 ‘동지의 일양’이 되고 ‘하나의 촛불’이 되어서 각 가정에 등불을 오래도록 밝혀줄 것입니다.
『설사 천년을 묵은 어둠이라 하더라도,
촛불 하나 밝히면 어둠은 없습니다.』
동지가 들면 ‘말라 비틀어진 마당의 풀도 새 마음을 낸다’고 하니, 부처님 자식인 저와 우리 불자佛子님들께서는 이 동지를 기해서 저마다 새로이 신심信心을 일으키고 다져서 부처님 가르침으로써 다가오는 새해를 무던하게 그리고 감사하게 가져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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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래한와백운루(困來閑臥白雲樓)하니
피곤하면 와서 이 흰구름이 왔다~갔다 하는 이 백운의 누각에 와서 한가히 누워라.
송풍소소성절절(松風蕭蕭聲絶絶)이다.
그 솔바람 소리가 쇄~쇄 하며 스쳐가는구나.
청군래차보여년(請君來此保餘年)하소
청컨댄 여러분은 여기에 와서 남은 해를 잘 보존하소.
기유소혜갈유천(飢有蔬兮渴有泉)이로다.
배가 고프면 채소가 있고 목이 마르면 맑은 물이 있나니.
– 태고보우 ‘白雲菴歌’